속도의 시대, 고요를 짓다

  • Date2025.04.01

사색의 소멸

과잉의 시대다. 30년전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소멸의 미학>에서 정보와 이미지의 과잉 생산으로 실재가 소멸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만 해도, 평범한 우리의 삶과는 유리된 급진적인 사상가의 과도한 수사라고만 여겨졌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시대에 폴 비릴리오의 급진적인 언술은 인스타그램의 무한 스크롤 사진 피드가, 유튜브의 짤막한 숏츠가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빅데이터라는 용어가 탄생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는 시시각각 그 양을 가늠하지 못할 만큼의 정보가 흘러넘치고 있다. 게다가 네트워크의 속도는 테라비트급의 6G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사회의 디지털 전환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관통하며 우리 일상에 급격하게 스며들었다. 이제 모두가 스마트폰을 통해 온갖 서비스를 구독하고 이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우리 삶의 총체적인 디지털화는 스마트기기를 신체의 연장으로 변모시켰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스마트워치에 기대어서 세상과 소통한다.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6인치 화면 속에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빠져있는 현상을 누군가는 ‘스몸비(smombie)’라는 신조어로 조롱하기도 하지만, 이미 신인류의 뉴노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스마트기기를 통한 소통은 촉각, 청각, 시각, 후각을 동시에 사용하는 전통적 소통 방식을 극단적으로 평면화시켰다. 정보는 그 생성과 유통의 속도가 대면소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방대하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잠시의 여백을 못 참고 스마트 폰을 꺼내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짧은 공백의 시간을 소요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멍 때리는 공상의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의 시간을 되찾는 것은 전투가 되어버렸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을 되찾아야 한다. 인간의 실존은 우리를 에워싸는 공간을 바탕으로 도래한다는 실존주의적 관점에 비춰보면, 속도와 정보의 과잉노출로부터 물러서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춘 공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명상과 사색은 정보, 이미지, 기호로부터 분리된 공간에서 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클로이스터라고 하는 은둔 장치

건축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세상으로 부터의 분리를 꾀한 공간 형식이 두드러졌던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중세 시대였다. 속세로부터 고립되어 수도와 신앙생활에 정진하기 위한 수도사들의 공동체를 짓기 위해 수도원들은 클로이스터(cloister)라는 공간형식을 고안했다. 클로이스터는 고립, 가로막힘을 의미하는 라틴어 ‘clausturm’ 에서 기원하는 단어인데, 지붕으로 덮힌 반외부공간으로서 회랑을 지칭한다. 주로 성당이나 교회, 수도원에 부속된 중정의 공간에서 사용되었으며, 수도사의 세계와 회랑 밖 속세와 분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수도사들은 외부와 차단된 클로이스터를 거닐며 숙고와 명상의 시간을 보낸다. 1175년에 건축이 시작된 ‘토호네 수도원(Thoronet Abbey)’의 클로이스터는 건축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수도원의 한 가운데 자리한 클로이스터는 수도사들 생활의 중심으로 한 변의 길이가 약 30미터 가량되는 사다리꼴 형태를 지닌다. 회랑과 중정을 구분짓는 두터운 벽과 볼트 천장의 단순한 형태는 명과 암의 콘트라스트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클로이스터는 경사진 땅위에 놓이면서 고르지 않은 지형을 반영한 바닥레벨의 점진적 변화로 주변 환경과 통합성을 유지한다. 가톨릭의 ‘시토회(Cistercian)’ 수도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로 후일 많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의 원천과 같은 역할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토호네 수도원의 영향력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는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이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르 꼬르뷔지에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마리-알랭 쿠튀리에(Marie-Alain Couturier) 신부의 요청으로 라 투레트 수도원(Monastery of Sainte Marie de la Tourette)의 설계를 맡게 되었다. 무신론자였던 르 꼬르뷔지에에게 쿠튀리에 신부는 설계에 임하기 전에 토호네 수도원에 가보기를 권유하였다. 그 곳에서 ‘침묵의 서약을 지키며 사색과 명상에 전념하고, 변치않는 공동체적 삶을 살았던 수도원의 본질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르 꼬르뷔지에는 토호네 수도원을 방문한 이후 이 곳을 ‘진실의 건축(architecture of truth)’이라고 극찬했다. 그에게 로마네스크 양식의 클로이스터에서 발견한 절제된 빛과 깊은 그림자는 큰 영감이 되었다. 바로 몇해전 작업인 ‘롱샹성당(Notre-Dame du Haut, Ronchamp)’에서 시도했던 백색의 자유로운 비정형 형태로 예술성을 추구했던 르 꼬르뷔지에는 바로 이어서 설계한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 그의 언어를 포기했다. 투박한 재료인 노출콘크리트를 통해 영적 공간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으며, 중세시대 수도원의 평면을 참고한 고전적인 어휘는 고요와 침묵이 지배하는 또 하나의 모던 마스터피스를 탄생시켰다.

공간의 질서와 평온

네덜란드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건축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한스 반 데르 란(Hans van der Laan)은 주류 건축담론에서 부각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하던 중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수도원에 은거하게 된다. 고립된 환경 속에서의 삶은 속세에서 이루지 못했던 비젼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신학, 철학, 기술이 융합된 건축을 지향하는 한스 반 데르 란은 ‘공간이 외부로부터 분리된 보호막이 될 뿐 아니라, 평온과 질서를 되찾게 해주어야한다’는 믿음을 지녔다. 보쉐학파(Bossche School)의 리더격 인물이기도 한 한스 반 데르 란은 ‘Plastic Number’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이는 공간을 정의하는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명료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비례 체계이다. 그는 이 시스템을 통해 인간이 공간을 이루는 부분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질서의 명료함이 마음과 영혼의 평온과 안식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1986년에 완공한 프로젝트인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St.Benedictusberg Abbey at Vaals)에서 이 질서 체계는 공간의 높이와 개구부의 크기, 벽의 두께, 기둥의 크기, 가구의 치수에 이르기 까지 건축의 전반을 질서 짓는 도구로 활용된다. 이 공간의 거주자는 화려한 재료와 장식이 제거된 검박한 재료의 구축물 안에서 조화로운 비례를 지닌 요소들의 관계를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한스 반 데르란은 엄정한 수학적 질서 속에서 구축된 공간만이 인간의 사색을 위한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건축가였다. 그는 단독주택, 예배당, 수도원 몇 작품만을 과작한 건축가이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질 기회가 적었다. 소수의 작업들은 최근 건축계의 연구대상이 되면서, 벨기에 안트워프에서는 ‘A House for the Mind’라는 아주 적절한 타이틀을 지닌 전시회가 열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바 있다.

몸을 일깨워주는 건축

가까운 일본 건축가들의 최근 작업 중에도 외부와의 경계로 구축된 공간이 사유와 명상의 순간을 선사하는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들이 있다. 일본의 차세대 건축가 이시가미 준야(Ishigami Junya)는 2020년 가나가와공대 광장(Plaza of Kanagawa Insitute of Technology Plaza)을 완성했다. 이 프로젝트를 설계할 때 주어진 미션은 대학의 다목적 공간이면서 반옥외인 장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건축가는 ‘다목적’을 기능의 다양함이 아니라, 학생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의 다양함으로 확장 해석했다. 약 4,100제곱미터 면적의 가나가와공대 광장은 얇은 천과 같은 지붕이 대지 전체를 덮은 형상을 띈다. 실제로는 12mm 두께의 강판으로 된 지붕 아래에 광장이 놓인 형국인데, 이 광장에는 지붕을 지지하기 위한 기둥도 벽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장은 2.2~2.5m로 아주 낮게 디자인되어 약 90m에 가까운 장스팬의 공간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건축이 지닐 수 밖에 없는 일반적인 원칙을 거스르는 전복적인 순간이 방문자들을 놀라게 한다.

곡면으로 휘어진 지붕면에는 59개의 오프닝이 뚫려있는데, 학생들은 자유롭게 바닥에 앉거나 누워서 하늘로 향해 열린 풍경을 바라보며, 자연의 변화를 오롯이 체험하게 된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그늘의 위치와 형태가 변화하고, 우천 시에는 떨어진 빗물이 투수성 좋은 아스팔트 바닥에 바로 흡수된다. 덕분에 광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비내리는 풍경을 마른 바닥에 앉아서 관조할 수 있다. 이시가미 준야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학생들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몸으로 경험하는 지에 있다고 한다. 정보와 이미지의 과잉노출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자연의 흐름과 시간의 경과를 몸으로 체험하는, 현대인들이 잊어버린 감각을 다시 호출하는 근사한 프로젝트이다.

멍 때리는 시간과 공간

일본 세토 내해의 한 섬에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가 있다. 이 일대의 섬들은 1960년대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주민들이 떠나면서 쇠락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베네세(Benesse) 그룹’의 회장인 후쿠다케 소이치로는 이 지역을 치유의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신념아래 오랜 기간 건축과 예술의 거장들을 초청하여 아트 인프라를 구축해왔다. 덕분에 나오시마, 이누지마, 테시마와 같은 섬들은 예술과 회복의 공간으로 손에 꼽히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인구 800명 규모의 작은 섬인 테시마에는 물방울 모양의 납작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테시마 아트 뮤지엄(Teshima Art Museum)이 자리하고 있다. 니시자와 류에가 2010년에 설계한 건물로서 40mX60m 크기의 콘크리트 쉘로 구성된다. 테시마 아트 뮤지엄에는 제한된 인원만 입장하여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밀도를 항상 의도된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미술관 내부에는 아트 뮤지엄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전시물들이 없고 거대하게 비워진 콘크리트 공간과 바닥 곳곳에서 스며나오는 물방을의 움직이 눈에 보이는 전부이다. 이 곳에 머무르다보면 금새 이 곳의 전시작품은 이 공간 자체와 지붕에 뚫린 2개의 커다란 구멍을 따라 흐르는 바람의 소리인 것을 깨닫게 된다.

입장시에 방문객은 스마트폰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자기 몸의 일부처럼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빼앗기게 되면서, 우리는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요즈음 전시회를 가게 되면 누구나 현장을 담아두기 위해 사진 찍는 행위에 열중하게 되고, 때로는 전시감상과 인증샷 사이에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마저 갖게 되곤 한다. 하지만, 테시마 아트 뮤지엄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늘상 해오듯이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그동안 우리의 감각과 경험이 얼마나 스마트기기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인식하게 되는 계기는 이렇게 마련된다. 비워진 공간, 바닥에 흐르는 물방울, 하늘과 숲을 향해 커다랗게 뚫린 천장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동안 잊고 지내던 ‘멍 때리는’ 순간을 경험하는 일 밖에 없다. 과다하게 우리를 자극하는 디지털 정보의 바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연과 우리 몸 본연의 감각으로 돌아가 정지된 시간을 맛보게 되는 것이 니시자와 류에라는 기민한 건축가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속도의 전쟁에 매몰된 현대인들은 점차 몸으로 체험하는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 이대로 문명이 진화하면 대부분의 감각기관이 퇴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에 명상과 사색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건축의 공간은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멍 때리는’ 시간과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